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산 왕조 (문단 편집) == 종교 == [[조로아스터교]]가 국교였으며, 조로아스터에서 갈라져나온 [[마니교]]와 [[마즈다크교]]도 같이 유행했다. [[미트라교]] 같은 고대 종교도 고립된 산악 지역을 중심으로 계속 유지되었다. 사산 왕조 시기의 페르시아인들은 의외로 '''그들 이전에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와 [[키루스 대왕]], [[다리우스 1세]] 같은 고대 페르시아의 명군들에 대해 무지했다 한다.'''[* 다만 이들은 지중해 동부 대부분 지역과 [[트라키아]] 일대가 한때는 페르시아의 영토였다는 사실은 파악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 탓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케메네스 문명이 어찌나 철저하게 잊혀졌는지, 초기 사산 왕조는 아케메네스조의 존재조차 몰랐던 것으로 거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후에 생겨난 문명이 떠오를 지경이다. 사산 왕조 초창기에는 [[알렉산드로스 3세]]에 대한 제한적 지식밖에는 없었던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산 왕조는 아케메네스조를 '''간접적으로 계승한''' 파르티아를 다시 계승한 국가니만큼 기록도 희박한 500여 년 전의 아케메네스 왕조보다 헬레니즘 왕조들이 더 익숙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사산 왕조의 샤한샤와 귀족, 사제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권위를 신화에 주로 의지한 것으로 보이는데, [[페르시아어]] 문학의 단골 등장인물인 로스탐과 전설상의 왕국인 카야니아 왕조 신화가 그 결과물이었다. 이들이 신화를 들추어내고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게 된 시점은 고대 그리스 문헌들이 페르시아 내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인들에 의해 [[아람어]]로 활발하게 번역되고, 아르메니아인 기독교도 귀족들과 후궁들이 페르시아 사회에 뿌리내리며 《성경》의 키루스 대제와 바빌론 이야기가 사산 왕조의 샤한샤와 귀족들에게도 구체적으로 소개된 서기 6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또한 사산조가 [[아시리아인]]들을 정복하고 나서 그들에게서 과거 페르시아를 지배한 왕조에 대해 들어서 비로소 본인들의 역사를 알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출처는 '이라크의 기독교'] 사산 왕조의 기독교인들은 초창기에는 주로 제국 서부에 거주했으며, 종종 로마 제국에 협조한다는 의심을 사면서 대대적인 탄압을 겪기도 했다. 동로마 제국에서 사산 왕조의 주류 기독교 종파였던 [[네스토리우스파]]를 이단시한 이후에야 사산 왕조에서는 이들에 대한 의심을 거두었다 한다. 이후 기독교는 사산 왕조 전역으로 전파되었는데 심지어 사산 왕조와 교역하던 [[트란스옥시아나]] 지역에서도 네스토리우스파가 번성했었다. 또한 사산 왕조의 아르메니아인 후궁들은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를 믿는 아르메니아인 동포들을 후원하였다. 또한 아르메니아인 장수 슴바트 4세 [[바그라티온 왕조|바그라투니]]가 [[에프탈]]의 카간을 전사시킨 공로를 인정받았는데, 사산 왕조의 아르메니아인 기독교인들은 그 이후 다른 기독교인이나 유대인들에 비해 더 좋은 처우를 받았던 듯 하다. 제국의 동부에서는 인도계와 중앙아시아계를 중심으로 불교도 널리 유행했다. 다만 이전 파르티아와 다르게 사산 왕조에서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화하는 과정에서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을 중심으로 불교를 적극 탄압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불교 교세는 고대에 비해 많이 약화되었다 한다. 그래도 파르티아 시기에 불교가 유행했던 덕분에 마니교에 불교 교리와 수행 방법의 많은 부분이 도입되었다. [[야즈데게르드 1세]]는 모후 슈샨두흐트가 유대인이었던 영향으로 유대인에게 우호적이었으며 [[이스파한]]에 대규모 유대인 거주지를 신축하기도 했다. 조로아스터교에서 갈라져나온 종교 중에서 마니교 다음으로 유행했던 종교로는 [[마즈다크교]]가 있다. 마즈다크교는 마니교와 유사하지만 대신 마니교의 염세주의와는 다른 쾌락주의적 성향이 있었다. 이 외에도 마즈다크교는 원시공산주의에 기반을 둔 개혁주의 분파로 모든 재산을 평등하게 나눌 것을 주장하는데, 바로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대신 마즈다크의 의견을 중용한 [[카바드 1세]]가 귀족들과 마기들의 권한을 제한하고 동양의 춘대추납과 비슷한 형태의 복지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기록에 따르면 마즈다크교는 결혼 대신에 남녀가 서로의 짝을 공유할 것을 주장하는 파격적인 가치관을 두었다 하는데, 마즈다크가 정확히 이런 가르침을 전파했다기보다는 마즈다크교가 도시 빈민 계급에게 인기를 얻었다는 점 때문에 생긴 이미지로 보인다. 마즈다크교 신도 상당수는 도시 빈민들이었고 이들은 페르시아 귀족들의 하렘에서 여자들을 납치하는 일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